1.
이정서 씨는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쐈느냐, 정당방위였느냐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해석에 관해 프랑스 카뮈 연구회 측에 문의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며, “황당”하다고 합니다.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쐈느냐, 번역이 아닌 해석의 문제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과 다소 무관한 문제라고 이정서 씨가 이 논란으로부터 면책되지는 않습니다. 이정서 씨는 [역자노트]에 명백히 뫼르소의 행위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라고 서술해놓았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라고 추가했습니다. 번역의 문제든, 해석의 문제든, 이정서 씨가 [역자노트]에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쏜 것이 아니라고 썼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물론, 누구든 자유롭게 문학 작품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적절히 반박을 하면 최종적으로 독자들이 어떤 해석이 더 정확하거나 타당한지 판단하면 됩니다. 굳이 이정서 씨가 어떤 ‘책임’을 지거나 후속조치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정서 씨는 단순히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정서 씨는 [역자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다섯 발의 총성이 단지 태양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과연 프랑스인들이, 세계인들이, 노벨문학상위원회가 그렇듯 카뮈와 뫼르소에 공감하고 <이방인>에 열광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번역은 이 모든 것을 거세시킨 불구였던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결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이유다.
이정서 씨는 이런 취지로 몇 차례 인터뷰를 했고,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마케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카뮈 연구회에 문의해본 결과,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타당합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정서 씨가 [역자노트]에 담긴 서술, 프랑스인들과 세계인들은 태양 때문에 뫼르소가 총을 쏘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서술이 확실히 반박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관해 독자들이 느꼈을 혼란을 해소시킬 책임이, 이정서 씨에게 있습니다.
2.
그런데 이정서 씨는 아직까지도, 프랑스 카뮈 연구회의 입장 ‘따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카뮈 본인의 말은 어떨까요? 카뮈 본인이 남긴 말과, 이정서 씨의 주장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인정하겠습니까? 카뮈는 영어판 <이방인> 번역본에 서문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서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이정서 씨의 서술과 카뮈의 서문을 비교하기에 앞서 카뮈의 서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정서 씨는 이 서문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역자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 소설 <이방인>을 번역하면서 나는 영어판을 참조하고 있다. 두 언어에 어순 차이가 없고, 카뮈도 서문을 써준 마당이니 그 의미를 무시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프랑스어보다는 영어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정서 씨는 카뮈가 서문을 써줬으니 영어판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런 연유에서도 영어판을 참조했다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이정서 씨가 참고한 영어판은 어떤 영어판인가요? [역자노트]에 답이 나옵니다.
내가 참고하고 있는 이 책(Matthew Ward 역, <The Stranger>, Vintage Books) 역시 가장 신뢰할 만하다고는 하지만, 곳곳에서 원본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Matthew Ward의 영어판입니다. 이정서 씨는 다른 글에서, Stuart Gilbert의 영어판은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카뮈가 서문을 써준 영어판은 Matthew Ward의 영어판이 아니라 Stuart Gilbert의 영어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요? 이정서 씨는 카뮈가 서문을 써준 만큼 영어판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건 이정서 씨가 참고한 영어판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출간 전에 [역자노트]를 조금만 더 세밀하게 살폈다면 금방 잡아낼 수 있는 오류였습니다. Matthew Ward의 영어판은 1988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는데, 거기에 카뮈가 서문을 실어줬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여하간 카뮈의 1955년 서문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On ne se tromperait donc pas beaucoup en lisant dans l'Étranger l'histoire d'un homme qui, sans aucune attitude héroïque, accepte de mourir pour la vérité.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을 <이방인> 속에서 읽는다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 김화영 역.
다음으로 이정서 씨의 [역자노트]를 보겠습니다.
앞의 번역이 전부 잘못되어 있으니 이해를 잘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뫼르소가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하는 저 말만 듣고 만들어 낸 오해였던 것이다. 기실, 저 문장에서 방점은 ‘태양 때문’이 아니라, ‘두서없이’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에 찍히는 것이다. 앞서 밝힌 바대로(역자 노트 18항 참조) 뫼르소가 총을 쏜 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는 위협적인 칼날’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선, 지난 번에도 말했듯이 여기서 ‘칼날’이란 ‘햇빛’에 대한 은유일 뿐만 아니라, 설령 아랍인이 내민 단검이 맞더라도, 단검의 칼날이 햇빛에 반사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칼날이 햇빛에 반사가 된다는 것은, 칼날이 햇빛에 가 닿았다가, 햇빛에 튕겨져 나갔다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다 양보해서, 뫼르소가 태양 때문이 아니라 아랍인의 단검 때문에 총을 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이 아니라, “얼떨결에 말을 툭 뱉어서 죽은 인간”이 됩니다. 카뮈 본인의 설명과 너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카뮈는 뫼르소가 진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석해서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았다고 <이방인>을 읽은 독자들은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맞습니다.
3.
이정서 씨는 여태까지 한국 독자들이 <이방인>을 완전 오해해왔으며, 부조리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질타했습니다. 순간 혹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차분히 생각해보면 1970-80년대 한국의 학계는 세계 다른 곳에는 없는 그런 ‘독창적인’ 해석을 개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주로 외국의 해석과 평론을 수입해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예외였을까요? <이방인>을 읽은 한국의 불문학자들이, 자기만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을까요, 아니면 일단 프랑스 문단의 해석을 수용했을까요?
김화영 씨의 <이방인> 번역본 뒤에는 김화영 본인의 해설이 아닌, 장-폴 사르트르, 피에르-루이 레, 로제 키요의 해설이 실려있습니다. 애초부터 한국 독자들은, 프랑스 평론가와 학자들이 작성한 <이방인>의 해설을 봐왔습니다.
사르트르의 해설과 이정서 씨의 해설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우선 사르트르입니다.
부조리한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자 했던 이 세계, 세심한 배려를 다하여 인과율을 제거한 이 세계 속에서는 가장 조그만 사건조차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김화영 역.
다음은 이정서 씨입니다.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기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요? 모든 게 우연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과관계에 대한 태도가 정반대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과율이 없기 때문에 바로 모든 사건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이정서 씨가 보기에 인과관계가 부재하는 소설은 ‘엉망’입니다.
4.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도 이정서 씨는 이 모든 것을 여전히 ‘해석’의 문제로 치부하며 ‘번역’에는 이상이 없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알라딘 블로그에서는 jaibal님이,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던가요? 이정서 씨는 권위를 다 내려놓고 이야기하자면서도, 그 중에서 기사화된 것, 이름있는 사람(로쟈)에 의한 것, 교수인 줄 알았던 사람(고마해라)에 의한 것에 대해서 주로 대답해주지 않던가요?
그럼에도, 한 번만 더 속는 셈 치고 이정서 씨의 번역이 지니는 문제를 검토하겠습니다. 이정서 씨는 김화영 씨가 <이방인>의 첫 문단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고, 이정서 씨 번역에는 한 치의 오류도 없다고 자신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이제부터 첫 문단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겠습니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 « Mè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김화영 역.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 이정서 역.
[역자노트]에서 이정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문장[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은 번역도 잘못됐다. 앞에 전보 내용이 다 나와 있는데, 그것만으로 ‘뜻’이 없다니? 모친이 돌아가셨고, 내일 장례식이 있다는 ‘뜻’이 거기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뜻이 없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우선 ‘아무런 뜻이 없다’는 ‘ne veut rien dire’에 대한 번역인데, 그 동사 원형은 ‘vouloir dire’입니다.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의미하다’, ‘뜻하다’로 번역됩니다. 그게 부정문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뜻’이나 ‘의미’란 문리적인 ‘뜻’과 ‘의미’만이 아니라 거기에 어떤 가치가 부여되는지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문리적으로 전보에 ‘뜻’이 담겨있더라도, 그게 자기에게 별 가치가 없다면 ‘아무런 뜻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정서 씨의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번역이야말로 틀렸습니다. 저 전보에서 모친의 사망, 장례일 등은 알 수 있습니다. 이정서 씨는 이것이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라는데,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라서, 그렇게 몇 가지 사실만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정서 씨가 참고했다는 Matthew Ward의 영어판에서는 ‘That doesn’t mean anyth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정서 씨보다는 김화영 씨에 가깝군요.
다음으로 이정서 씨는 [역자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이제 번역 문제로 돌아오면, 보다시피 위 원문에 밑줄 친 je ne sais pas(나도 모르겠다)가 아예 빠져있다.
김화영 씨 번역에서 ‘je ne sais pas’가 빠진 것은 맞습니다. 김화영 씨의 오역이지요. 그런데 ‘je ne sais pas’가 어째서 ‘나도 모르겠다’가 되는지요? 저기서 ‘je’는 ‘나’, ‘sais’는 ‘알다’, ‘ne, pas’는 부정의 부사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알지 않는다’, 즉 ‘나는 모른다’입니다. 어디에도 ‘나도’의 의미는 없습니다. 다시 Matthew Ward의 영어판을 보아도 ‘I don’t know.’입니다.
더구나 이정서 씨는 원래 한 문장인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를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라고, 두 문장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정서 씨에 따르면 이 정도면 작가의 문체를 해체시켜버리는 게 아닌가요? 직역하면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입니다. 이기언 씨가 바로 그렇게 번역했지요.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이정서 씨가 오역을 지적했다고 주장하는 첫 문단에서만 이정서 씨는 두 군데 오역을 해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첫 문단은 이기언 씨 번역본이 제일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 이기언 역.
이렇듯 첫 문단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미 김화영 씨 번역본에 있던 문제점을 상당부분 개선한 이기언 씨 번역본이 있는데도, 오역을 담은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김화영 씨 번역본 외 번역본들에 대해 “사실 다른 판본은 모두 김화영 교수판본에 빚지고 있습니다. 오역을 따라했다는 데서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연재 중에도 밝혔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엉터리라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니요?
첫 문단만 보아도 이정서 씨 번역본에는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앞선 번역자들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덧글
이런 토론을 이끌어내는 indindi님이 대단하다.
이정서님은 무조건 김화영씨를 당신의 자리로 내리려 하지말고 일단 indindi님 정도의 칼날을 받을 수 있는지 부터 증명해라.
indindi님이 항복하면 김화영씨에게 물을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은 별스럽지 않은 자리에서 학문적 선배 김화영씨에게 뭐라하면서
정작 indindi님이 불문학도라고 단정하면서 자신이 선배 운운 하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다. 이정서 당신도 김화영의 입장에서 indindi에게 먼저 도전에 응하라.
그리고.
내가 볼땐 이정서님 글이 좀 어거지같다. 독자에게 맡긴다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독자만 찾는거 같애.
indindi와 이정서가 격이 맞는지 안맞는지 학문적으로 먼저 토론해라.
그리고 이정서님. 다른 분의 말에 수긍도 좀 하십시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의 좋은 점마저 까먹게 합니다.
일단 당신은 김화영에게 내려오라하면서 다른 사람의 반발에 법적 운운... 이건 정말 토 나옵니다.
원점에서 토론할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주세요. 사전적 해석만 가지고 내가 옳다고만 하지 마시고 더 깊이 공부한 사람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좀 가져 보세요. 왠 아집이 그렇게 센지...
솔직히 indindi님 글과 이정서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indindi님에게 기울어지고 있답니다.
안스럽습니다.
고백컨대 indifference를 열번만 타이핑 해도 손가락 관절이 쑤셔옵니다. 스펠링 체크는 덤.
mbc 뉴스에 나와서 딱 한 마디한 김욱동 교수와 한기호 씨에게는 길게 반론을 쓰며 대응하면서도
정작 진지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지적하고 질문하는 indifference 님은 애써 회피하는 이유가 있겠죠.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사장이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사람이란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구요.
실력이 없으니 진정한 권위는 있을리 없고, '권위주의적'이기만 한 사람.
이대식 사장이 자신의 주장에 진정성이 있다면, 새움 블로그에서 indifference 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을 거라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이곳 블로그에 와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일이구요.
불어 문장이 지닌 미세한 결들을 거칠게 거세한 문장들이 많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indifference 님이 지적한 이정서 역본의 오역들에서도 느낄 수 있구요.
요는, 이정서씨는 본인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에서 본인이 유일하게 ,를 쓴 양 주장하고 있지만 이미 앞선 번역가 중에 그걸 한 분이 있었다는 거였고, 앞선 번역가들을 김화영 교수의 아류 번역가로 낙인 찍고 저런 식으로 폄하하는 일이 얼마나 오만한가에 대해 비난하고 싶었습니다.
김예령 씨의 번역을 옮겨드리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 김예령
김화영 교수가 명일이라고 쓴 것에 대해서도 비난하신 걸 봤는데 이 분이 먼저 '내일'이라는 단어로 demain을 표현하셨네요 ㅎ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김화영 역.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 김예령 역. 2011. 5. 출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 이기언 역. 2011. 6. 출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 이정서 역. 2014. 3. 출간
<이방인> 중엔 사실 최수철 씨 번역이 가장 궁금하지만... 그 출판사 이름은 입에 올리기도 싫은 터라.
김화영 김예령 이기언 역을 보면 각자 확실한 개성이 있는데,
이정서 역 문장은 왠지 조합의 느낌이...
"살인 장면이 무대에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우선 그 대목은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양이 가득한 살인이며 여기서 태양은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드라마가 전개되도록 만들어진, 그야말로 중심입니다." (카뮈, <이방인>에 대한 편지; 김화영본, p.226)
가장 대중적인 역본에 실린 자료인데 이걸 못 보셨을 리도 없고. '핵심' '중심'을 외면한 채로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으신지.
해석뿐만 아니라 번역 자체에도 문제가 정말 많군요.
서점서 정가 다 주고 샀는데, 어떻게 환불 안 되려나요.
너무 억울해서 이거 원...
요는 실제 구매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방송국인 France Culture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주제로 다룬 방송분이 있습니다. 주말 오후 프로그램인 <Le Gai Savoir>의 2012년 10월 21일자 방송입니다. (링크 http://www.franceculture.fr/emission-le-gai-savoir-l-etranger-camus-2012-10-21) 방송 중 33분20초 이후의 내용을 잘 들어보세요. 사회자와 대담자가 <이방인>의 해변가 장면에 관해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사회자: ('태양 때문'이라는 뫼르소의 증언 낭독) 이게 유일한 동기인가요?
대담자: 유일한 동기입니다. (살인사건) 이전에 일련의 상황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마송과 마송의 단짝... 친구 레몽과 함께 해변가에 있었지요. 레몽인지 마송인지가 곤란한 문제에 얽혀 있었는데...
사회자: 레몽이지요.
대담자: 아, 맞아요. 포주 레몽이었지요(Raymond le souteneur).
사회자: (웃으며) 자기 말로는 '창고관리인'이라고...
대담자: (웃으며) 자기 말로는 '창고관리인', 하지만 실제로는 포주고, 아랍인 무리 중 한 남자의 누이(la soeur d'un Arabe)를 폭행했지요. 이들 무리가 레몽을 쫓아 왔고.... (이후 생략)
직접 방송을 들어보시고 위 번역문의 fidelity를 판단해 보십시오. 녹취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올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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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서 씨는 레몽의 실제 직업이 '창고관리인'이고, 그의 정부는 아랍 사내와 - 혈연 관계가 아닌 - 내연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독자들, 특히 프랑스의 독자들 역시 이정서 씨의 주장대로 <이방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충분히 검증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자신이 틀렸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겠다는 공언도 하셨습니다. (이정서,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정말 태양 때문이었나?', 2014/04/28)
사실 이정서 씨의 주장은 카뮈연구회 학회장 Spiquel 씨의 답신을 통해 이미 그 허위성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정서 씨는 이 연구단체의 위상과 공신력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전문가의 말도 안 믿겠다고 홀로 생짜를 부리시니, 그렇다면 프랑스 대중의 <이방인>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드리기 위해 위의 라디오 방송 내용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새움 편집자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France Culture는 학술교양에 특화된 공중파 라디오 채널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한번 더,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역자 이정서와 새움출판사의 양심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저는 그게 매우 궁금합니다.
"확인 결과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이정서)
이정서 씨의 이러한 단언들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도 정말이지 궁금한 일이구요.
이정서씨는 정상인의 범주에서는 살짝 벗어나신 것 같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직원들 중에는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믿어요. 아마 처음부터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침묵하는 것 뿐이겠지요. 밥그릇은 숭고하니, 개인적으로는 직원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정서씨가 쏟아놓은 단언들의 근거는 역시 "돈"일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단순히 "무식"이나 "중2병적 근자감"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진행될 수록 그런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 상황을 고려한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도 하나의 강력한 요소로 넣고 싶네요.
당연히 저도 새움 쪽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고 있어요.
장차 고명하신 번역자의 필명을 거론할 때 '씨'자를 빼버리겠다는 사소한 통첩인데
제가 이런 말 할 계제는 아니지만 사실 된소리 타이핑 하는 거 무척 싫어합니다. 띄어쓰기 지키는 것도 싫고요.
존경은커녕 존중할 수도 없는 사람에 대해 이런 수고를 계속할 이유는 없지요.
예를 들어, 'De toute façon, il ne faut rien exagérer et cela m'a été plus facile qu'à d'autres.'라는 문장을 '어쨌든 아무 것도 과장해선 안 되고, 그건 내게 다른 일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라고 옮기셨던데 여기서 'qu'à d'autres'는 '다른 일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번역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올려봅니다.
이정서 번역만이 아니라 김화영 번역, 그리고 이기언 번역과 김예령 번역의 문제점도
눈에 띄는 대로 지적하는 것에 이번 번역논쟁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cela a été plus facile à moi qu'à d'autres (personnes).
사소한 실수긴 해도 참신한 제목과 분석력에 비하면 번역이 좀 아쉽네요.
그보다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이 눈에 띄어서 당분간 이걸로 고민하게 될 듯.
indifference 님이 흔쾌하게 구입한 책은 아닐 터이니, 눈길이 좀 더 매섭겠네요 ^^
알라딘 100자평에 별 다섯개 평점이 다섯개가 올라왔네요.
5월 27일 아침나절 두어 시간 동안에.
이걸 조직적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지, 한 사람이 올리는 것이라 해야 할지...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64742#CommentReview
또 이건 뭐지? 이 사람들 독자 맞아?
이런 의구심이 드는 사람들...
http://blog.aladin.co.kr/710236183
http://blog.aladin.co.kr/763128100
새움출판사 이대식 사장은 반성하거나 주저하거나 회의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네요.
좀 그렇죠;;;;
그러나 이제 흐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사실을 아셨고, 새움에게 분노하고 계신다는 것.
순위는 어느새 50위 밖으로..
저는 내심 새움의 움직임이 없는 게 나름 고심의 시간이 아닐까 기대했었는데, 넘 순진했나봐요.
'약속은 지키는 모습'을 형식적으로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이제까지 그래왔거든요. 또 어떤 답변을 준비하고 계시지 기대되네요^^.... 그나저나 김예령 씨 번역 읽고있는데 좋네요.